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깊게 관여해선 안된다.

‘이웃 나라에의 발자국’ 출간한 구로다 기자 인터뷰

앞으로 한일 양국이 나아갈 방향은?

주간지 동양경제가 ‘이웃 나라에의 발자국(隣国への足跡)’이란 책을 출간한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와 진행한 인터뷰를 부가설명과 함께 그대로 소개한다. 일본뉴스앱에서 톱에 올랐던 2017.9.17일자 기사다.

한국 거주 35년. 한반도 정세에 밝은 일본의 언론인 산케이신문 서울주재 객원 논설위원 구로다 가츠히로(黒田勝弘). 그의 신간 ‘이웃 나라에의 발자국(隣国への足跡)’은 한일 근현대사를 탐구하면서 앞으로 한일 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에서 1987년 대한항공 KAL기 폭파 사건까지 일본과 관계가 깊은 역사를 다루고 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소재로 쓴 체험적 한일 관계사다.

이웃나라에의 발자국(隣国への足跡). 서울 거주 35년 일본인 기자가 추적한 한일 역사 사건부 (KADOKAWA / 328 페이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일본인은 알아야

─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는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남북 분단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일본에서 혐한 반한 붐이 일며 “한국과 교류를 중단해야 한다”는 국교 단절론을 비롯하여 한국을 멀리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일본에 있어서 교류를 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이며, 동시에 한국에서도 밀고 들어오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일본인은 알아야 한다.

─ 이 책에는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 이은(李垠) 전하와 결혼한 일본의 황족 이방자 (마사코) 왕비 (결혼전 이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梨本宮方子 1901 ~ 1989년)를 비롯한 유명 무명을 불문하고 많은 일본인을 소개하고 있다.

한일 역사속에 자리잡은 일본인을 소개한 것은 한일 관계사에서 그들이 보여준 ‘일본인의 기개’를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방자(李方子) 왕비다.

그녀의 인생은 격동의 한일 역사 그 자체다. 결혼 자체가 나라를 위한 정략 결혼이었지만 1989년 사망했을 때 한국은 ‘마지막 왕조 장례’라고 하며 극진한 장례식을 올렸다.

이 때 많은 시민들이 ‘우리 왕비’ 라며 장례 행렬을 배웅했다. 특히 정장을 한 노파가 길거리에서 큰절을 올리며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예를 다하는 배웅 장면은 잊을 수 없다.

이씨 조선을 붕괴시킨 일본의 왕족 출신이면서도 정략 결혼이라는 운명을 감수했고 전후에는 장애아 교육과 지원에 헌신하는 모습을 한국민은 지켜보았다.

─ 같은 왕족으로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사망한 일본 육군 중좌 이우(李鍝) 전하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 이우 전하의 전속 부관인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 중좌는 출근 시 몸이 불편했던 탓에 전하를 보필하지 못했다. 이에 책임을 느낀 그는 장례식 다음날 자결한다.

전하의 미망인 박찬주(朴賛珠)씨는 요시나리 중좌에 대해 “무인의 거울이자 모범, 죽은 주인(전하)의 곁으로 갔다. 지하에서도 남편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고 편지를 남겼다. 이렇게 일본의 명예를 지킨 일본인도 있다.

구로다 가츠히로 (黒田 勝弘) / 1941년생. 교토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도통신 입사 후 1978년 한국 연세대 유학. 교도통신 서울지국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겸 논설위원 등을 거친다. 저서로는 「한국 반일 감정의 정체」「한국인의 역사관」「한반도 21세기의 심층」등.

─ 보통의 일본인이 보여준 기개도 소개되어 있네요.

한국의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어린 시절 북한 북서부 · 평안 북도 정주에 살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주에서 남하해 온 일본인 해외거주자들을 정주역에서 보았다.

식량 배급 때 더러워진 피복을 걸친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그는 매우 놀랐다는 것이다.

제대로된 식사가 불가능한 피난 중에도 앞뒤를 다투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는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일본인도 있었다. 지금도 그의 일본인에 대한 생각은 옛날 그대로다.

동일본 대지진 때도 피난민의 질서정연한 행동이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이러한 일본인의 기개는 패전 당시 고난의 후퇴 속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 한편, 1895년에 일어난 ‘민비 암살’ 사건은 일본에게 뼈 아픈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데…

한일 근현대사에는 일본인으로서 제대로 조치를 못하고 외면한 쓰라린 역사가 있다.

민비 암살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주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楼)를 필두로 군인과 민간인까지 가세하여 왕궁을 습격했다. 사건 후 귀국 조치를 당한 그들은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불과 4년 전 방일중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 (니콜라이 2세)를 경찰 츠다산조(津田三蔵)가 습격한 ‘오오츠 사건(大津事件)’의 대응과 정반대다.

러시아의 압력과 보복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황태자에게 부상을 입힌 츠다를 사형시키도록 사법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법원은 현행법상 사형에 해당이 안되다며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후일 사법부의 독립을 지켰다고 평가를 받는 판결이다. 왜 이와 같은 판결이 민비 암살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그들의 무죄 방면은 일본이 그 후의 대륙 진출 과정에서 ‘현지의 독주’를 눈감아 주고 국가의 방향성을 잘못된 곳으로 이끈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는 쉽게 빠져들고 깊이 관여하기 쉬운 상대

─ 35년간의 한국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반도에 깊게 관여하지 말라”고 쓰고 있다.

최근 일본에 있어 한반도는 ‘빠져들기 쉽고 깊이 관여하기 쉬운 상대(引き込まれやすく、深入りしがちな相手)’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사의 백강전투(白村江)와 중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도 그렇지만 한반도와의 관계는 일본이 깊이 관여한 역사이며, 동시에 빠졌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으로 일본은 한반도 정세에 휘말려있다. 일본은 북한과 전쟁 할 생각이 없고 선제 공격의 의도도 없지만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장 깊이 관여한 것은 청일전쟁(1894년)과 한일합방 (1910년)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지만 일단 한번 관계를 가지면 일본인의 마음은 자극을 받고 들뜨게 되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매력을 느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중독적 매력은 동시에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뼈 아픈 역사를 만들어 버리는 복선이 될지도 모른다.

1977~1981년에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스노베 료죠(須之部量三) 전 외무 차관에게 “이 땅에 다리 두개를 다 넣지말고 한개는 밖에 내 놓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두다리를 모두 넣어버리면 만일의 경우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은 한반도와 마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돌아 보며 말할 수 있는 것은 해협을 건너 북쪽으로 향할 때는 신중하면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라. 다리를 빼내지 못할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백강 전투는 663년 8월에 한반도의 백강에서 벌어진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신라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당·신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