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노태우의 군사 반란 12·12 사태 다음날 신문뉴스

12·12 군사 반란 다음날 1979년 12월 13일자 경향신문 1면!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 조사

전두환·노태우가 권력 찬탈을 위해 일으킨 군사 반란사건으로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

12·12 쿠데타 또는 12·12 사태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숙군 쿠데타 (粛軍クーデター: しゅくぐん, 군인 숙청)로 부른다.

영어 표현은 Coup d’état of December Twelfth

38년 전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국가 권력을 탈취했다.

12·12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 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 김영삼 정부는 이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선고받았고, 노태우는 징역 15년, 벌금 2626억 원 추징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이들은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1979년 12월 13일 신문기사

12월 12일 밤 교통통제

심야 강남교통 차단…시민들 걸어서 귀가 [경향신문]

13일 국방장관 특별담화 발표

12·12 사태 다음 날 노재현(盧載鉉) 국방부장관 특별담화문 발표 [경향신문]

국방부에선 초병끼리 오인 총격! 국민은 정부,군 믿고 동요말길

정 총장 연행 과정에서 경미한 충돌!

김재규 조사중 새로운 사실 드러나..정승화 체포

새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대장 임명!

13일 서기원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 계엄사령관겸 참모총장에 임명 되었다고 밝혔다.

서 대변인은 모든 것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2·12 사태 미국과 일본반응

일본: 민주화 작업 불변.일 외무성 논평!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민주화작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미국: 주한미군 상황변화 없어..미, 한국정부에 사태설명 요청

1979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

김재규 범행 관련 혐의, 일부 장성도 구속수사

통행 차단된 12일 초저녁 육참총장 공관입구. 12일 저녁 8시부터 통행이 차단된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입구

미 국무성, 북한 모험 강력 경고! 민주화 저해면 한미관계 차질

주한미군에 경계령, 미국인 학교 휴교 및 여행 제한 조치

전두환의 12.12 사태 하극상에 의한 쿠테타적 사건 [강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