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명이 희생된 오키나와 전투 추도식 거행

오키나와전투 72주년 전몰자 추도식 

미-일 최대규모 격전 3달새 20여만명 숨져..본토진격 늦추려 일 ‘결사항전’ 명령

군대는 주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키나와 주민의 피맺힌 깨달음

세상의 모든 지옥을 섞어 놓은 것이 전쟁이다. 참혹한 전쟁의 실상

6월 23일은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 오키나와 전투(沖縄戦, Battle of Okinawa) 72년이 되는 날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1945년 오키나와 전투는 주민들까지 끌여들인 치열한 전투로 주민 4명 중 1명이 희생되었다.

격전지가 된 오키나와현(沖縄県) 이토만시(糸満市)에서는 ‘위령의 날’ 추도식이 열렸다.

조금전에 시작된 식전에는 아베총리와 오나가 지사 등 많은 지역주민과 유족들이 참배하며 평화를 기원하였다.

올해 새롭게 54명이 추가되어 전몰자 24만명의 이름이 새겨진 평화의 비석에는 이른 아침부터 친족의 이름 앞에서 합장하는 유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저희 가족들입니다. 11명이 여기에서 사망했다. 이토만에서..
생각하면 괴로워요. 아직도 밤에 잠을 제대로 못자요. 하지만 전쟁에 대해선 한시도 잊은 적 없어…
두번 다시 전쟁이 있어선 안된다. 많은 세월이 흘러도 눈물이 마르질 않아요.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추도식

과거 류쿠(琉球)로 불렸던 오키나와는 일본 남단 약 1,000km에 걸쳐 있는 섬들로 이뤄진 곳이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 왕국이었다. 15~16세기 대교역시대에는 명·조선·일본과 활발한 대외 무역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류쿠는 1609년 사쓰마 번(오늘날 가고시마 현)의 무력 침공·합병으로 명과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는 양속(兩屬:양 쪽에 속함)관계를 갖게 됐다.

이후 류쿠왕국은 1872년 류쿠번으로 격하되고, 1879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일본정부에 의해 국왕이 폐위된 뒤, 오키나와현으로 개칭됐다.

1945년 패전이후에는 미군 점령 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복귀했다.

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는 한국의 제주도와 닮았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펼쳐진 푸르름 속에서, 감춰진 아픔을 안고 사는 두 섬의 역사가 닮았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치른 오키나와의 무고한 희생과 해방과 분단의 과정에서 치른 제주의 아픔이 그것이다.

민중의 뜻과는 상관없는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도 본토 대중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응어리진 가슴을 제대로 풀어낼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도 닮았다.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오키나와 주둔 군인 및 일반 주민 20여 만명의 사망자와 더많은 부상자를 낸 전투다.

당시 미국은 남북 120㎞에 불과한 오키나와 본도를 전함 1500여 척, 전투부대 18만명을 동원해 공격했다.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현지 징집인원까지 합쳐 11만명이었다.

작은 섬에서 석달간이나 전투가 계속된 것은 일본 군부가 미군의 전력 약화와 본토 진격을 늦추기 위해 ‘결사항전’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미군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동물”로 묘사하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욕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는다”고 선전하며 항복이 아닌 죽음을 강요했다.

요미탄의 치비치리 동굴에 있던 주민은 칼과 낫, 끈 등으로 가족과 주민끼리 서로 죽이며 ‘집단 자결’했다.

일본군은 미군에 협조하는 오키나와 사람을 찾아낸다는 구실로 ‘스파이 사냥’을 벌이며 주민을 살해하고, 서로를 불신과 감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동굴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는 동안 일본군은 주민의 식량을 뺏고, 동굴 입구에 일반 주민을 배치해 총알받이로 삼았다.

일본군은 현지 여학생들을 군에 입대시켜 히메유리부대라는 종군 간호부대로 삼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미군의 가스탄 공격으로 동굴 안에서 몰살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2주일 동안 동굴에서 나온 피난민의 수는 무려 8만여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 절반은 부상자였다.

이 와중에 사망한 애꿎은 한국인 징병·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도 1만여 명(추정)에 달했다.

일본군은 조선인들이 이적행위를 할 수 있다며 따로 감금시키고, 이들을 집단 총살했다.

미군 상륙 뒤에는 한국인들에게 막대기를 주고 적진으로 뛰어들라는 명령을 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군도로 처형했다.

일제는 오키나와인들에게 천황제와 ‘집단자결’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죽음을 강요하거나 사지로 몰아 넣었다.

최근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은 수많은 사람을 다시 전쟁의 문법에 꿰어 맞추기 위한 시도다.

동아시아인들이 이를 우려하는 것은 내가 사는 땅이 제2의 오키나와가 되고, 나 자신이 ‘집단자결’의 대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