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히로시마 원폭의날 앞두고 한국인 피폭자 이종근 별세

5일 밤 원폭돔 앞을 흐르는 모토야스강(元安川)에는 평화와 넋을 위로하는 화톳불, 카가리비가 불을 밝혔다.

8월 6일은 히로시마 원폭의날 (広島原爆の日)

1945년 오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어 8만명이 즉사했고 피폭 후유증으로 30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35만명 수준이었다.

한국인 2만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하지만 77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수치는 모른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한반도에서 일제 징용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피해자를 5만명, 이 중 사망자를 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흘 뒤인 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 `팻맨(Fat Man)`이 투하되어 7만여명이 죽었다.

원폭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다.

히로시마시 중학생들 평화공원 방문한 외국인에게 자신들이 생각한 평화의 메세지를 영어로 전하고 있다.

피폭자들의 목소리

원고에서 사라진 여섯 글자!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이종근(李鐘根) 위원장

당시 국철(国鉄) 근무 16세 소년, 폭심지에서 1.6km 떨어진 곳에서 피폭을 당했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지고쿠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이종근 위원장은 원폭의날 1주일전 7월 30일 맹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히로시마시는 원폭의날 행사장에서 방영하기 위해 피폭자 19명의 영상메세지를 녹화했는데 시청 담당자가 이종근씨의 원고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냐!? 가장 말 하고 싶은 부분을 짤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영상메세지는 아래와 같다. 51초짜리 단문이다.

“그날 피폭당한 한반도 출신자들은 같은 피폭자이면서 종전 후 외국인 취급으로 버림받아 원호를 받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あの日被爆した朝鮮半島出身者たちは、同じ被爆者でありながら、終戦を境に『外国人』として(切り捨てられ、)援護を受けられないまま多くの人が死んでいきました」

빨간글자 외면, 버림받았다(切り捨てられ)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재일한국인 2세 이씨는 에가와 마사이치(江川政市)이라는 일본이름으로 세딸을 키우면서 조용히 살아왔다.

그에게 2012년 큰 변화가 있었다.

피폭자들이 선내와 기항지에서 피폭 증언을 하는 피스보트 세계일주 크루즈에 참가하면서부터다.

한국 여권을 가진 이씨는 80세가 넘은 나이에 본명인 이종근(李鍾根)을 한국인 모임이 아닌 외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본명으로 세계 각지의 정치인과 시민단체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피폭 경험을 얘기했다.

2017년 친한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그는 일본이름으로는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전쟁중 일본이 저지른 가해와 지금도 계속되는 차별에 대해 말하면 다른 피폭자들이 일본을 깍아내리는 발언을 한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재일한국인으로 피폭자로서 이중의 차별에 시달려온 이종근씨 

자라면서 조센징, 기무치 쿠사이, 소변 세례 등 갖은 놀림을 당했다.

피폭 후 화상 상터에 생긴 구더기를 어머니가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꺼내면서 빨리 죽어라(パルリチュゴラ,早く死んでくれ)고 했다고 한다.

당시엔 치료약도 구하기 어렵고 진통제도 없어 고통스러워 하는 아들을 불쌍히 여겨 무심코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다.

모친의 헌신적인 치료로 4개월 후 직장에 복귀하지만 피폭 사실을 아는 동료들은 그를 멀리했다. 당시 원폭증은 전염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가 보낸 온 팩스

이종근씨는 히로시마시의 외곽단체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가 위촉하는 피폭체험증언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수학여행 학생들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젊은이들은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미래를 만들어 나갈 책임은 있다”고 호소해 왔다.

「若い人たちには、過去に対する責任はないけれど、未来を作る責任はある」

올해 1월 검사에서 암이 발견되면서 활동은 축소했지만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해왔다.

6월에 히로시마시로부터 영상 메세지 녹화를 의뢰를 받고 담당부서에 보냈는데 며칠 후 담당자가 문제가 된 여섯글자에 이중선을 그어 삭제를 요구하는 팩스를 보내온 것이다.

한국 등 해외에서 피폭자가 수첩과 피폭수당 신청이 가능해지고 일본 거주 피폭자와 동등한 원호를 받게 된 것은 2016년이다.

1972년 한국인 피폭자들의 최초 소송 이후 50년만이며, 종전 71년만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원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키리스테 (切り捨て/ 버림, 외면)가 아니면 뭔가!?

그는 시청 담당자 요구대로 여섯글자 삭제에 동의했지만 전날 8월 5일 열리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제에서 짤린 부분을 포함해 전문을 읽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7월 27일 저녁 친분이 있는 지역의 프리랜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8월까지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울면서 연락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기자는 다음날 자택을 찾아갔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 일본에는 그런 풍조가 남아 있다. 차별. 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지.. 팩스를 받고 왜 이런걸 지워야 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이틀 후 이씨는 별세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이 죽으면 문구가 삭제된 사실을 세상에 알렸으면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시청 담당자에게 연락하여 다른 정치적 이유 때문에 삭제한 것은 아닌지 문의해도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명확한 이유는 듣지 못했다.

8/5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이종근씨의 딸들

장녀는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가 얼마나 불안하게 죽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생전에 말했다”며 “핵과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고 싶다”고 말했다.

피폭 10년전 히로시마 시내 풍경